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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샬루 샬렘 예루샬라임!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9:28~44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9년 1월 13일 2부예배

   2017년 12월6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고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무력충돌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말대로 평화로운 도시로 유지되었던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분쟁의 역사는 길고도 복잡하며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은 뺏고 빼앗기는 다툼과 분쟁, 그로 인한 슬픔과 눈물의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은 ‘유대교인 구역, 아르메니아인 구역, 기독교인 구역, 이슬람 구역’으로 4분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과 함께 예루살렘을 둘러싼 갈등과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끝에 예루살렘을 눈앞에 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42절, 새번역) 어떻게‘예루살렘’은 이름의 뜻과 같이‘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요? 단지 예루살렘 성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도성은 어떻게‘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을 통해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배꼽, 예루살렘

   드디어 예루살렘입니다. 누가복음9:51절부터 시작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끝날 지점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 여행의 마지막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하여‘예루살렘’이 지니고 있는 중요성 때문입니다. 이사야49:6절,“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말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땅 끝’구원을 위한‘등대’,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예루살렘’은 그 등대의‘불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중요하고 거룩한 이유는 단지‘터가 높고 아름다워서’(시48:2) , 이스라엘의 수도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처소인 거룩한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구약성경 말씀 몇 곳을 확인해 봅시다. 역대하6:6절,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시편135:21절,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이사야서24:23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전 동쪽 문지방 밑에서 시작된 물이 결국은 강을 이루고,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시들지 아니하는 잎과 끊이지 않는 열매 맺는 각종 과실나무들로 달마다 새 열매’를 먹게 될 것(겔47:1-13)이라는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렇듯 예루살렘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대해 시편137:5-6절,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이런 예루살렘을 가리켜 라틴어로 ‘세상의 배꼽’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이니, 구원자요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셔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행렬을 따라가 봅시다.



새끼나귀 탄 만왕의 왕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 때에 지나게 되는 작은 산이 감람산입니다. 그 산의 정상에 못 미쳐서 ‘벳바게와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자 둘을 불러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십니다. 가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것을 풀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거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풀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왔고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아무리 상상해보아도 우스꽝스러운 장면입니다. 촌부들이 나귀를 이동수단으로 이용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새끼 나귀는 타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더군다나 ‘주 이름으로 오시는 왕’(38절) 의 행차로서 새끼나귀를 탄 것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고대 당시 왕의 대관식은 멋진 말이 끄는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에 왕이 서서, 군대나 환영단의 호위 속에 입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끼 나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이런 입성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순간의 우발적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스갸라9:9절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병행절인 마태복음21:5절에 의하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하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겸손에 대해 바울은 빌립보서2:6-8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입성 방식은 또한 그 분의 통치 방식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10:42절,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세상 나라’는 ‘권력을 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임의로 주관’하고 ‘권력을 부리는’ 방식에 의해 유지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정반대 방식으로 작동됩니다. 마가복음 10:43-45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낮춤으로 상대로 높이고,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줌으로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시고자 하십니다. 

   이런 통치방식만이 예루살렘이 진정한 의미의 ‘평화의 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도성은 ‘평화의 도성’이 될 수 있습니다. 힘의 우위에 의한 평화는 숱한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런 평화는 언젠가는 무너지고 맙니다. ‘힘의 눌림’은 결국은 ‘힘의 보복’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본문 41-44절을 읽어봅시다. 큰 돌들로 쌓은 웅장한 예루살렘 성이 평화를 보장할 것 같지만 결국은 더 큰 힘 있는 원수들에 의해 짓밟힐 것을 말씀하십니다. 힘의 우위에 의한 평화의 결국이 이런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 곧 ‘왕’(王)으로 모셔 들일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늘에서의 평화와 영광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맞은 편 감람산에서 내려가실 때에 제자들의 온 무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 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들의 외침 가운데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평화는 사람들 간의 문제만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간의 갈등과 불화, 다툼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갈등과 불화는 하나님과의 불화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 는 하와와 아담, 인간관계의 갈등과 불화는 죄로 말미암아 “내가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라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불화에 기인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 모든 피조세계와의 불화와 갈등과 반목가운데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평화의 왕’은 사람들 간의 관계회복을 통한 ‘평화’만이 아니고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한 ‘평화’를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누가 죄로 인한 사람과 하나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하여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여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시적으로 기술합니다. 골로새서1:20-22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42절)라고 탄식하시며 우셨습니다. 단지 본문 당시의 예루살렘 성 뿐일까요? 이 도성, 서울을 보시면서 동일하게 탄식하시지 않으실까요?‘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성’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극히 자신을 낮추어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 뿐입니다. 뿐 만 아니고 이 도성 서울이 ‘평화의 도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 역시, 겸손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시편122편은 예루살렘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 중에 6절의 전반부,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라는 가사로 지은 히브리 찬양이 ‘샬루 샬렘 예루샬라임!’입니다. 예루살렘 뿐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도성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평화가 임하도록 이 찬양으로 찬양합시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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