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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8신앙 여정의 선명한 목적지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8:31~34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8년 11월 18일 2부예배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인생 여정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12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동행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과 저도 예수님의 여정에 동행자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여행 목적이며 동시에 예수님과 동행하는 모든 동행자들이 지녀야 할 목적이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분과 동행하는 여러분과 제가 지향해야 할 목적지는 어디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의 성취

   누가는 누가복음 중심부에 위치한 9:51절부터 19:44절 까지를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라는 주제 하에 여정 중에 있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여행 목적에 대해 밝히셨습니다. 앞선 두 번은 누가복음9:22-23, 9:44절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여행을 출발하기 직전 밝히셨던 여행의 목적에 대한 말씀을 읽어봅시다. 9:22절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인 오늘 본문 31-33절 중반절도 읽어봅시다. 
   예수님이 밝히신 것 같이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본문 31절 말씀에서 밝히듯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첫 번째 목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9:22)과 ‘이방인들’(18:32-33절 상반절)에 의해 희롱과 능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는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기’(9:22,18:33)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결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회적 성취나 성공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31절)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4:32,34절,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는 말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셨습니다. 비록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 중에 사람들로부터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 말씀,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온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의 목적은 자신의 목표와 야망을 실현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요한복음17:4-6절 말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여러분과 제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 하나님 뜻을 전적으로 이루셨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본문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32절에 등장하는 ‘인자’(人子)라는 말입니다. 인자는 예수님만이 사용하신 독특한 자기칭호였습니다. 예수님 이전에 그 어떤 선지자, 랍비도 이 ‘인자’라는 용어를 자신에 대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호칭’에는 그 호칭에 합당한 ‘정체성’이 부여됩니다.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신 것은 그 호칭에 담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자’라는 칭호에는 ‘이중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과 저와 같은 ‘육체와 인성’을 지니시고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인성을 가진 사람은 존귀하고 아름답습니다(창1:31)만 동시에 육체와 인성으로 인한 한계와 그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4:15절 말씀 같이 예수님은 ‘죄’를 빼고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육체와 인성을 지니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겪는 어려움과 고난,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빌립보서2:6-8절  말씀 같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셨던 분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겪지 않아도 될 고난과 고통을 겪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죄인들을 구원’(막2:17,롬5:19)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32-33절 상반절이 예수님이 ‘인자’ 즉 육체와 인성을 지닌 ‘사람의 아들’로서 겪으셨던 고난과 고통을 약술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넘겨지시고, 희롱당하시고, 능욕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채찍질 당하시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이미 구약성경 시편41:9절, 시편22:16-18절, 이사야서53:4-7절, 시편16:10절 등에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실 뿐 아니고 본문 32-33절과 같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 가장 분명히 예언되어 있는 것은 이사야서 42:1-4, 49:5-6, 50:4-11, 52:13-53:12절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말씀일 것입니다. 

   그 중에 이사야서53:3-11절을 읽어봅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자’ 즉 육체와 인성을 지닌 ‘사람의 아들’로서 겪으셨던 고난과 고통, 죽음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들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지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육체를 지닌 사람들을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의 죽음으로 대속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의 동행자인 제자들은 이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그 목적에 대해 처음으로 밝히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날마다의 ‘자기 부인’과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의 연속입니다.


부활의 소망

   예수님이 자기 칭호로 사용하신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첫 번째 의미와 함께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말씀은 다니엘서7:13-14절입니다. 다니엘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하나님)가 좌정하신 어전회의’를 봅니다. 이 천상의 어전회의를 보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하나님에게 ‘인자 같은 이’로 표현된 신적 존재가 인도됩니다. 그러자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즉 하나님이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권세는 영원’하고 그 ‘나라는 멸망하지 않을 나라’일 것이라고 합니다. 역사 이래로 영원하고 멸망하지 않은 세상 나라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인자 같은 이’가 다스리는 나라,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고 멸망하지 않을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보여 진 환상 중 ‘인자 같은 이’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신학적 전개과정과 논증에 적잖은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데 동의합니다. 어떻게‘인자’,‘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가‘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고 대행하시는 ‘주’(왕)가 되셨습니까? 오늘 본문 33절 하반절,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3-4절, 빌립보서2:8-11절을 읽어봅시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하나님 아들’로 선포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고통 앞에서의 절규와 탄식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보여준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우리, 사람과는 본질이 다른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의 핵심고백(고전15:3-4)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결국 죽음 이후 부활로 인해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예수님을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눅13:33, 새번역)라는 한결 같은 자세로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있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또한 예수님과 동행하며 길을 가는 모든 제자들, 여러분과 저의 발걸음을 힘 있게 하고 흔들림 없게 하는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고전15:20,22-23절 말씀같이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부활 할 순번은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 여러분과 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본문 34절의 제자들 같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여정의 목적과 의미가 모호한 상태로 동행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고전13: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는” 정도에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씀,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말씀 같이 모든 것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이해와 실재에 이를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선명한 목적지, ‘말씀의 성취, 십자가의 길, 부활의 소망’을 향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눅13:33) 신실하게 걸어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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