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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5승리자의 면류관, 권리포기

  •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9:1~27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20년 10월 25일 2부 예배


   쉬는 날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등산을 합니다. 자명한 이치이지만 ‘산’은 내려가는 것보다는 오르기가 더 힘듭니다. 하지만‘삶’은 올라가기보다는 내려가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육신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그렇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 내려가기, 내려놓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피치 못하게 ‘내려가기’,‘내려놓기’를 통해 형성되어갑니다. 또한 하나님나라도 내려가기 내려놓기를 통해서 이루어져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그 나라를 위해 내려놓는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삶을 사셨고, 복음의 증인으로 보냄을 받은 사도들 역시 그랬습니다. 본문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그 중에 한사람입니다. 참 깊은 신앙의 경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배워봅시다.  
 

사도로서의 권리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8~10장은‘우상의 제물’에 대한 바울의 권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선 8장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식과 자유’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한계 안에서 누려야,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자신이 직면했던 상황을 실제적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사도로서의 권리가 있었지만, 그 권리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이웃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내려놓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리확립에 주안점을 두고 권면을 시작합니다. 본문 1~11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이곳에서 15~16개의 역설적 질문을 쏟아냅니다. 1절,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내가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에서 시작해서, 11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르기까지 열변을 토합니다. 
  이 모든 질문들은 자신이 사도로서의 마땅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서 사도로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했는데 바울은 본문 1~2절을 통해서 자신이 이 조건들을 충족하고 있음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먼저 사도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인 부활하신 주를 보았음(1절)을 말합니다. 사도행전9:3~5절에 기록된 대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행9;15, 갈2:8)로 세워주셨습니다. 또한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인할 수 없는 복음 전파사역의 결과는 다름 아닌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사람들(고전4:15)입니다.  

   이외에도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리가 정당함을 변론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 특별히 게바, 베드로를 빗대어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신도 베드로 사도같이 가정을 꾸리고, 믿음의 자매와 함께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5절)고 합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같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교회의 섬김을 통해 생활하며 사역할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6절). 이어서 바울은 ‘군인, 농부와 목자’(7절)가 수고한 대가를 받는 것이 마땅함을 비유해서 자신의 권리를 정당화합니다. 바울은 심지어 율법은 사람이 아닌 농사에 동원된 소도 수고의 몫을 누릴 권리(9절)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신령한 것’을 뿌린 자신이 ‘육적인 것’을 거두는 것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라(11절)고 강변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결코 사도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성경의 절반 정도를 기록한 바울을 사도로 의심하거나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 기록적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베드로 사도가 바울 앞에서 초라해 보일 정도입니다. 


자발적 권리포기

   바울이 이토록 구구절절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로서의 권리를 확립하기위해 여러 근거들을 동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까? 무시당하는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와 진실함을 세워가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가 무시되면 자신이 전한 복음 또한 하찮은 것으로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보다 의도적이며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 졌던 권리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을 얻고’(19절),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22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12~23절이 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1~11절)했다가, 곧 그 권리를 쓰지 않겠다(12절)고 했다가, 또 다시 권리의 타당성의 근거를 제시(13~14절)했다가, 다시 그 어떤 권리도 쓰지 않겠다(15절)를 반복합니다. ‘왔다갔다’하는 글의 흐름을 통해 꽤나 격정적인 상태에 있는 바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의 흥분상태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 본문 15절 중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이라고 합니다. 표현자체도 상당히 과격합니다.

또한 우리말 번역에는 이 말과 다음에 이어지는 ‘누구든지’가 바로 연결되어 있지만 신뢰할 만한 원문 사본들에는 끊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가, 다른 말로 문장을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이런 현상을 돈절법이라고 부릅니다. 문장을 도중에서 그치는 생략법 가운데 하나로 화자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여 문장 도중에 멈추었다가 다른 문장을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조된 감정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아무튼’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안위와 체신과 명예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반대로 권리를 포기하기 위한 선제적 절차로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뿐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바울은 권리를 포기하고 내려놓음으로 ‘더 많은 사람을 얻고’(19절),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22절)하고 싶은 심정으로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리포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행적은, 빌립보서2:5~8절 말씀같이 앞서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걸은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그 길을 따라 걸읍시다. 


승리자의 면류관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 결코 마지못한 결심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느 때에 불일 듯 일어났다가 사그라지는 감정적 격동이 발동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반대로 바울은 자신의 자발적 권리포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상(賞)이라고 여겼고, 이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여전히 달음질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 17~18,24~27절이 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8절을 읽어봅시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 자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받을 ‘상, 상급’이라고 합니다. 

   권리포기와 희생으로 인해 받을 그 어떤 ‘외적인 반대급부’가 아니라, 자신이 권리를 포기함으로 섬기는데서 오는 ‘기쁨 자체’가 자기의 상,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줄 때 맛보는 ‘내적인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행20:35)한 것임을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발적 권리포기는 진정한 자유의 근거이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을 상급입니다.
   바울은 이 상을 받고 누리기 위하여 자신이 여전히 달음질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성도들에게 자신같이 달음질 할 것을 촉구합니다. 24~27절을 읽어봅시다. 

   본문 당시 고린도에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는 ‘올림픽’ 다음으로 인기가 있던 ‘이스티미안’ 경기가 격년으로 열렸습니다. 이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서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린도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경기에 참가하는 달리기 선수, 격투기 선수는 승리의 관을 받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25절)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쳐 복종’(27절)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훈련하는 운동선수들에 대한 영상을 보노라면 눈물겹습니다. 모든 승리자의 면류관은 땀과 눈물로 빚은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권리포기와 내려놓음을 통해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일은 결코 그리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한 때에 그렇게 권리포기, 내려놓기를 결행했다고 그것이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순간마다 목표를 새롭게 인식하고 달려야 하고, 절제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달리기의 푯대, 승리의 관을 위한 절제, 쳐 복종시켜야 할 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권리포기’입니다. 내려가기 내려놓기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스러운 노예생활 중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 서쪽 호렙 산에서 부르셨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은 모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8)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신발은 겉옷, 가락지와 함께 신분과 그에 따른 권리를 상징합니다(눅15:22).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모든 권리를 내려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그를 통해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로서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바울과 모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권리포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하나님의 상급, 하늘의 기쁨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내려가기 내려놓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고, 하나님의 상급,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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