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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있는 자리에서 꽃피워라!

  •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7:17~24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20년 10월 11일 2부 예배
   예수 믿고 신앙생활하면 급격한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변화를 겪고 그로 인한 놀랄만한 유익을 누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받아들임으로 그 사람의 삶의 자세가 달라짐에 따라 사회적 신분과 지위의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생각보다 느리게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지위, 능력의 변화는 고린도후서9:6절,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씀같이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세상 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 예외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종적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명’(19절)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갈4:19)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부름 받은 그대로 행하라!

   결혼과 이혼, 독신과 재혼에 대해 권면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7장은 매우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7장 전체는 ABA'의 순환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A에 해당하는 1~16절에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해, 그리고 A'에 해당하는 25~40절에서는 ‘독신과 재혼’에 대한 바울의 권면입니다. 

   바울은 제기된 각각의 주제에 대한 권면만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고 확대된 성경적 원리들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성(性) 문제를 의뢰받고는 부부의 성문제 뿐 아니라, 성경이 보여주는 부부의 ‘상호 동등성’(3~4,14절)에 대해, 그리고 독신과 재혼에 대한 권면에서는 독신자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어느 정도 내적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할 것’(29~31절)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7장 전체 구성에 있어서도 동일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보자면 본문 17~24절은 앞(결혼과 이혼)과 뒤(독신과 재혼)의 긴 이야기 안에 들어 있는 ‘짧은 여담’이고, 오페라의 ‘간주곡’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담과 간주곡이라고 해서 앞뒤의 이야기를 환기하거나 양념을 더하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17~24절은 ABA'의 순환구조로 되어있는 7장 전체의 중심에 해당합니다. 앞뒤 이야기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신학적 토대, 신학적 기둥’입니다. 

   17~24절은 다시 한 번 ABCB'A'의 순환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작과 끝에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라는 말씀으로 수미상관(17,24절)을 이루고 있고, 이 순환구조의 중앙 역시 “각 사람은 부름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각자에게 주어진 인종과 신분, 사회적 지위와 여건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처지 ‘그대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각각의 신분과 지위에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 가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예로 들어 설명을 덧붙입니다. 하나는 18~19절의 ‘할례자와 무할례자’이고, 다른 하나는 21~23절의 ‘종(노예)과 자유자(주인)’입니다. 

   바울은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이든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노예)이든 자유인(주인)이든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데 사회적 신분과 여건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두 가지 경우만이 아니고 7장 전체에 계속 등장하는 ‘기혼자와 미혼자’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과 부자’,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을 포함해 그 어떤 사회적 신분과 여건도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에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자유를 사용하라!

   바울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한 것은 각자에 주어진 사회적 신분과 지위와 여건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본문 21절 말씀같이 바울은 신분과 지위, 여건을 개선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이용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정당한 자유와 기회를 따라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와 여건을 개선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가장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신분과 지위의 변화를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2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뿐 아니고 여러 곳에서 주인에 의해 자유롭게 되고, 종의 신분을 벗어나게 된 비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6: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골로새서2:14절,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이 말씀들 같이 여러분과 저는 스스로는 어찌 해 볼 수 없는 죄의 종이었으며, 스스로 폐기할 수 없는 종의 증서가 엄연히 실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의 증서가 파기되어 자유로운 몸이 된 사람들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주인, 우리가 ‘주’(主)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의 종’(23절)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 어떤 사회적 신분과 지위와 형편에 매일 수 없는 자유인들입니다.

   단지 자유로운 몸이 된 것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1:12절 말씀같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었습니다. 에베소서2:5~6절 말씀같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가장 궁극적인 신분과 지위의 변화를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그 어떤 사회적 신분과 지위와 여건으로 자신을 규정하거나 그런 것들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본문22절 말씀 같이 사회적으로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으로 살고, 사회적으로 자유인이라도 주께 속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삽니다. 둘 다 그리스도에 의해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둘 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며, 둘 다 그리스도를 주로 섬겨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와 여건을 개선하고 증진할 수 있는 자유와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잘 이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이루지 못했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야합니다. 이미 가장 궁극적인 신분과 지위의 변화와 유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따라 살기를 힘쓰라!

   본문의 뒷부분에서 종과 자유인의 신분과 지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밝힌 바울은 앞부분에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신분과 지위 역시 그리스도의 부름을 따라 사는 것에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 다소 소극적으로 권했던 바울은 할례와 무할례자의 예로 들면서는 보다 더 단언적으로 권면합니다. 

 ‘할례자, 무할례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할 뿐 이라고 합니다. 본문18~19절을 읽어봅시다. 
  고린도교회는 주로 무할례자들인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 중에 할례 받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2:28~29절 말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육신의 할례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이미 받은 할례의 흔적을 지우는 시술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18절 전반부의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라는 말씀 중 ‘무할례자가 되다’(에피스타오마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곳에만 쓰이는 단어인데, 할례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수술과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할례의 흔적을 없애버리려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인들이 할례를 거세에 가까운 야만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로마사회에서 좀 더 나은 신분과 지위를 얻고 혜택을 누리려면 로마사람들처럼‘무할례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약과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온 것을 동경한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굳이 필요 없는 할례를 애써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려는 것에는 바울의 계속적인 골칫거리였던 유대주의자들의 부추김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두가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의미가 없는 짓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지위 그로인한 형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부름을 따라 살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데 하등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을 부르신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주를 섬길 수 있고, 주의 사람으로 빚어져 갈 수 있습니다. 
   본문 19절 하반절 말씀 같이 어떤 형편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혼인했든 독신이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온 율법의 성취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갈5:14)는 계명을 이룰 수 없는 신분과 여건은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 생활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어진 사회적 신분과 지위와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의 부름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 함께 행하는 사람입니다. ‘있는 자리에서 꽃피워라!’ 서양속담 같이 주어진 자리, 여건에서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꽃피워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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