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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타인은 지옥인가 형제인가?

  • 성경본문 : 사도행전 9:10~19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9년 9월 22일 2부예배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의 대사를 빌려다가 제목을 삼은 원작 인터넷 만화를 영화에 이어 드라마로 제작했다고 합니다. 2평도 채 안 되는 다닥다닥 붙은 고시원, 옆방 신음소리도 들릴 정도로 밀착된 공간에 잇대어 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감시할 수밖에 없는, 아니 그 정도가 아닌 서로를 지옥으로 여기는 시대상을 스릴러 영상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드라마 제목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도시환경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물리적 거리는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한 없이 멀어졌습니다. 점점 더 타인은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듯합니다. 

   본문에는 그리스인들을 원수같이 여기고 해를 끼친 사울을 찾아가는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와 다메섹으로 도망한 성도들에게 박해자 사울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그런 지옥 같은 사울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사울을 하나님이 사용할 그릇으로 삼았으니, 그를 찾아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에 일조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서로에 대해 점점 더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타인들을 대하여야 할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 먼 곳 다메섹까지 원정 온 사울은 결국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되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과 대면한 사울은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의 도시 한 복판 ‘직가’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을 찾아가, 성령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통해 사울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13절)라고 주님께 반론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보기에 사울은 사울 자신의 표현대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요, 성도들에게 사울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반론은 옳습니다. 정당했습니다. 

   이쯤에서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죄가 세상에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울과 아나니아의 시각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경쟁상대, 적대관계로 대하곤 합니다. 상대로 인해 자신이 손해, 피해라도 입게 되면 반감은 분노로 폭발하곤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교와 경쟁, 그로인한 반감과 분노의 심성은 우리 모든 사람들 안에 내재된 뿌리 깊은 본성입니다. 세상의 첫 가정 아담과 하와의 집에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가인’이 형이고‘아벨’이 동생이었습니다.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농사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소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원인은‘제물의 종류’에 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아벨과 그의 제물’,‘가인과 그의 제물’(창4:4~5)이라는 성경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제물을 드린 사람들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11:4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벨은 하나님을 삶의 주권자로 신뢰함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일로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가인은 동생과의 비교와 경쟁, 그로 인한 반감과 분노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동생을 들로 유인해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창4:8). 이것이 죄악 된 세상에서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와 경쟁, 그로인한 반감과 분노의 심성은 우리 모든 사람들 안에 깊이 뿌리내린 본성입니다. 서두에서 인용했던 무신론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로 자타(自他)의 인간관계를 서로를 부정하는 상극관계라고 정의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다시 여러분과 저에게 다급히 말씀하십니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반감과 분노의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여기고 대할 수 있음을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타인은 형제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마치 쫓기고 있는 쥐가 고양이를 찾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아나니아는 정당한 이유를 들어 사울을 찾아가기를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가라!’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울을 찾아가 회복시켜야 할 이유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사울을 찾아간 아나니아의 모습을 17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의 대담함과 너그러움의 정도가 보이십니까? 사울의 집에 들어간 아나니아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울에게 ‘안수’했습니다. 뿐 만 아니고 아나니아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형제 사울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하나님의 집의 가족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교회의 대적 중 괴수였던 사울을 형제로 맞은 것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아나니아의 감정, 아나니아의 견해, 아나니아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명령, 성령님의 감화로 가능해졌습니다. 

   아나니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보는 시각에도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타인들을 대하는 시선은 ‘비교와 경쟁’ 거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반감과 분노’였습니다. 심한 경우는 ‘타인을 지옥’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누린 사람은 ‘타인을 형제’로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안긴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타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잠재적 가족, 잠재적 형제’로 대합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무신론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자타(自他)의 인간관계를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서로 타인을 부정하는 상극관계라고 정의했지만 유대인 오스트리아 철학자 마틴 부버는 자타(自他)의 인간관계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음을 제시했습니다. 인격적 관계에서의 타자는 ‘나’에 대한 2인칭인 ‘너’, 즉 ‘너는 또 다른 나’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나와 너’ 사이를 멀어지게 합니다. 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갈라진 골을 더 깊게 파고, 둘 사이에 쌓은 벽을 더 높고 두텁게 만들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5:38,43~45,48절을 읽어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스도인들은 타인을 지옥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반대입니다. 비록 자신에게 피해와 혹 고통을 안긴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사랑과 기도의 대상으로 대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타인은 창조주 하나님의 ‘가족이요 형제’입니다. 


당신은 제자다!

   타인을 하나님의 가족이요 형제로 여기고 대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과 화목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 화목의 은혜를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후서5:17~19절을 읽어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이 모든 타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나와 같은 형제와 자매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변화된 신분과 사명 때문에 가능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불러 세워주신 신분과 사명이 관련된 몇 가지 칭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칭호들입니다. 10절의 ‘제자’와 13,14절의 ‘성도’, 15절의 ‘그릇’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과 성령’,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깨끗하게 씻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엡5:26,히9:14)입니다. ‘제자’는 누가복음14:27절 말씀같이 이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이뿐 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본문 15절 같이 그리스도께서 쓰시기 위해 ‘택한 그릇’입니다. ‘그릇’이라는 그림언어는 주인의 절대적인 처분권에 대한 강한 암시를 내포합니다. 예레미아18:3~6절을 읽어봅시다. 여러분과 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하나님의 화목의 복음’을 담아 ㅇ나를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그릇들입니다. 용도에 맞게 쓰이지 않으면 주인이 어떻게 처분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도와 제자, 예수님이 택하신 그릇’으로서 세상에 있는 모든 타인들을 향해 ‘화목’을 실어 나르는 것이 여러분과 저의 사명입니다. 주님의 성도, 제자, 그릇이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합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잉크하트는 “전 세계에서 세대별 가치관의 격차가 가장 큰 나라는 한국이다.”라고 했습니다. 세대별 가치관 뿐 아니라, 우리는 ‘이념, 계층, 성(性), 지역’ 등, 여러 면에서 갈등과 다툼,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점점 더 타인을 향한 골은 깊어지고 벽이 두꺼워지고 있습니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웹툰과 드라마가 그 사실을 대변합니다. 누가 이 골을 메우고 벽을 허물 수 있겠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였고 ‘하나님의 원수’(롬5:10)였다가 하나님과 먼저 화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과 저, 그리스도인의 몫이요 사명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화목의 도구로서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나라의 무대 한 복판으로 올려지는데 없어서는 안 될 버팀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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