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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8광야에서 길을 묻다!

  • 성경본문 : 사도행전8:26~40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9년 9월 8일 2부예배


   광야는 역설적 특성을 지녔습니다. 광야에서는 강을 만날 수 없습니다. 반면 드물지만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아시스의 물은 강물같이 넘실대지는 않지만 뱃속 깊은 곳에 있는 갈증까지 해소합니다. 광야에는 볼 것이 없습니다. 사방 둘러보아도 빈들이요 모래 언덕뿐입니다. 하지만 광야의 볼거리는 밤이 되면 얼굴을 드러냅니다. 

검은 벨벳 위에 뿌려놓은 다이아몬드 같이 쏟아지는 별빛을 통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로운 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는 소리가 없습니다.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와는 다르게 고요와 적막 그자체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는 자기 내면 깊은 곳, 존재의 심연에서 속삭이는 자기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있던 길도 잠깐 부는 바람에 순간 사라지곤 합니다. 그런가하면 광야는 한걸음 한걸음을 후회 없이 걸어가야 할 인생길에 대해 묻고 그 길을 찾도록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어내시곤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자신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묻고 찾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길을 묻는 곳입니다. 또한 길을 찾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길을 묻고, 급기야 광야에서 길을 찾은 한 사람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길을 찾았고, 그가 찾은 길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길을 묻다!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에서 북쪽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며 복음을 전하던 빌립에게 성령께서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 남쪽으로 향하여 가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해 빌립이 이른 곳은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인데 그곳은 ‘광야’(26절)였습니다. 하나님은 빌립에게 그 광야를 지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는 아프리카 대륙의 나일강 최상류에 위치한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맞은 고위관리 내시였습니다. 고대근동에서는 왕실에서 일하는 남자의 경우 생식기능을 없애 내시로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 내시가 유대인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었던지 그렇지 않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내시가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그 경외의 일환으로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고대 ‘에디오피아’는 당시 ‘그리스/로마의 세계관’속에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디오피아에서 온 내시는 당시 관점으로 보면 땅 끝, 가장 먼 곳에서 온 사람인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에디오피아 내시는 끝없이 ‘길을 찾고 있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길을 묻는 존재’입니다. 복음성가 가수 박종호의 노래, “이 길의 끝은 어딜까, 달리면 그곳에 닿을까? 고단한 하루 해가 지면, 아쉬운 눈물만 흘러간다.”라는 표현같이 사람은 끝없이 길을 찾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존재의 중심이 깊이 동의하고 신뢰할 만한 길을 찾기 전까지는 끝없이 묻고 물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사람은 평탄한 대로(大路)에서는 이 질문을 잘 하지 않습니다. 해도 건성으로 하곤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 삶의 광야에 이르게 되면, 시키지 않아도 진지하게 이 질문을 하곤 합니다. 아니 ‘길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광야는 결코 직면하지 말아야 할, 피해서 우회해야만 할 끔찍한 곳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만 독대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요, 하나님과만 독대할 수 있는 신비로운 곳입니다. 본문에 에디오피아의 내시처럼 하나님은 종종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 광야로 부르시곤 합니다. 그곳에서 길을 묻도록, 그리고 길을 찾도록!


광야에서 길을 잃다!

   광야 길에 들어섰다고 모두가 자기 자신을 있는 대로 대면하고, 회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 시작된 인생여정을 위한 탐색의 회로를 작동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길을 잃고 더 깊은 절망으로 방황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유프라테스 강변 갈대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창12:4) 척박한 땅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가나안 땅,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길이었습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은 얼마 되지 않아 그 길을 잃고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될 때에 아브라함은 길 되신 하나님께 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스로 길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나일 강 유역에 자리 잡은 애굽으로 가는 길(창12:10)이었습니다. 길 가면서 아브라함은 아내 사래에게 애굽에 이르러 사람들이 둘 사이에 대해 묻거든 ‘누이’라고 말하라고 사주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보신(保身)을 위해 아내를 애굽 사람들에게 내어주어도 상관없다는 형편없는 자기의식의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완전히 길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나일 강 유역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 광야’로 부르셨습니다. 광야로 부르신 이유는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여 있지만 모든 민족 중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과 열방나라 사이의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며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출19:5~6)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증표로 모세를 통해 돌 판에 새긴 ‘십계명’(출20:1~17)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갈 여정을 위한 일종의 ‘나침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 경외’를 자신들의 길로 여기지 않고, 약속의 증표인 ‘십계명’을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길의 나침판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인도할 신을 만듭니다. 자신들에게 있는 금붙이로 송아지 형상의 우상을 만들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4)라고 경배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본문의 주인공 에디오피아의 재무관리, 내시는 어떤지 살펴봅시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이 내시는 땅 끝,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여왕의 재정을 맡을 만큼 막강한 지위와 권력을 가졌지만 반면 한 인간으로서 감내해 내기에는 힘겨운 ‘내시’라는 혼돈의 길을 뒤로하고 순간순간 ‘기쁘게 걸어 갈 길’(39절)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찾았는데도 정작 이 내시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내시가 아직 길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본문29-31절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시는 ‘진리의 길’을 찾기 위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광야 길’ 위에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여전히 길을 찾고 묻고 있습니다만 길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광야에서 길을 찾다!

   어떻게 하면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길은 어디입니까? 본문32~3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그렇습니다. 길은 ‘성경’(32절)에 있습니다. 길은 성경이 가리키는 곳, 그 대상에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성경 구절은 구약성경 이사야서 53장이었습니다. 본문 32~33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 중에서 일부분, 7~8절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바로 앞 5~6절과 뒤 10~11절을 포함해 이사야서 53장 전체를 읽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묘사된 ‘도살자에게 끌려가는 양,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 같은 고난 받는 종, 그는 누구입니까? 왜 그는 고난가운데 죽임을 당합니까? 그가 죽은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사53:6)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사람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사람은 ‘나음’받을 길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사53:5). 그가 ‘상함과 질고’를 받음으로 사람은 ‘의롭게’되는 길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사53:10~11). 

   이렇게 죽임 당하는 어린 양 같이 고난 받은 종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합니까? 빌립이 본문 35절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에게 나오는 예수님에 대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선포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죄를 지고 죽으시는 대속제물 되신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35절,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는 말씀 같이 본문만이 아니라 실은 모든 성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4: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의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은 이 길을 찾기 전까지는 ‘진리의 길’을 찾아서 끝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드디어 길을 찾았습니다! 성경에 가리키고 있는 그 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36~38절의 기록 같이 주저함 없이 길 되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행2:38)를 받았습니다. 길을 찾은 내시가 어떻게 자기의 남은 길을 갔는지 본문 39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렇습니다. 존재의 중심이 깊이 동의하고 신뢰할 만한 길,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은 사람은 이렇듯 기쁘게 길을 걷게 됩니다. 





   광야에서 길을 찾고 방향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별’입니다. 앞뒤좌우를 둘러보아도 길이 어디인지 모를 때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광야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며 길을 걷게 만듭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길보다 더 확실한 인생길, 더 복된 길은 없습니다(시128:1). 광야에서 길을 발견하고 ‘기쁘게 길을’ 걸어갔던 에디오피아 내시같이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며 남은 인생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 (없음)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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