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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증인은 배운게 없어도 담대하다!

  • 성경본문 : 사도행전 4:1~22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9년 7월 17일 2부예배


   본문은 예루살렘 성에 있었던 적잖은 파장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 니다. 그것은‘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베드로와 요한’(13절)이 날 때부터 40년간 걷지 못해 성전 미문 앞에서 앉혀져 구걸하던 사람을 일으켜 걷게 했고, 이 일이‘나사렛 예수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임을 선포(행3:16)한 것입니다. 이 일로 온 예루살렘이 적잖이 들썩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견고하게 결탁되었던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가두고 심문하며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18절)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 모든 지도자들의 ‘위협과 경고’에도 조금도 위축되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19~20절)라고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의 사람들, 예수의 증인들은 어떤 위협과 반대에도 담대합니다. 가진 게 없어도 담대하고, 배운 게 없어도 분명합니다. 이에 대해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오염된 성전


   이미 지난 두 주일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성전 미문 앞에 놓였던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이 고침 받은 것은 단지 육체적 치유의 기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본문 당시의 ‘옛 성전종교’가 지니고 있었던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지어져 가는 ‘새로운 성전’의 도래와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치유와 그에 대한 설명과 말씀 선포가 이어지자 ‘남자만 약 오천 명’(4절)이나 되는 사람들이 치유의 근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싸고 견고하게 결탁되어 있던 모든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본문1~2,5~6절을 읽어봅시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왔고, 단단하게 뭉쳐진 모든 집단들의 대표들입니다. ‘대제사장들’(1,6절)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총괄하는 사람들이고, ‘성전 맡은 자들’(1절)은 성전의 질서와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이고,‘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5절)은‘산헤드린 공회’라고 불렸던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의결 기관의 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 가운데‘사두개인들’(1절)이 들어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잠시 독립시기를 다스렸던 마카비 통치시대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인 권력을 이양 받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 로마와 협력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본문 2절,“예수 안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라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 안에서 보편적 부활이 시작되었다는 베드로의 설교에 격분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를 기반으로 인해 형성될 새로운 세상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현 체제와 그것이 제공하는 특권과 혜택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 신앙생활이 본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성전은 역대하7:15~16절,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는 말씀같이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요, 하나님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자리’입니다. 또한 이사야서56:7절,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는 말씀 같이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지만 본문 당시 성전은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처럼 ‘강도의 소굴’(막11:17)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앞에서 열거했던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과 선함의 가득함으로 인해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시48:2)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는 예수님의 선언대로 A.D. 64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과 선함을 잃고 죄의 유혹과 오염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성전 된 우리들의 모습을 이 말씀의 거울에 자세히 비추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복음의 증인


   예루살렘 성전을 매개로 부와 권력을 누려왔던 여러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가두어두었던‘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고 추궁합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을 본문 10~12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는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에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변호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했던 걸인이 걷게 된 것이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일어난 일임을 증언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간명한 비유로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11절,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는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보다 ‘더 간단하게, 하지만 넉넉히 충분하게’ 제시한 말씀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시편118: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인용하지 않고 있지만  23절 말씀,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는 말씀 같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기인한 것’, 즉 이상하리만큼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판단되어 버려버린 돌과 같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성전을 둘러싼 여러 모양의 지도자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오병이어 기적 같은 놀라운 사건들을 경험했던 사람들뿐 아니라,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버림받았던 돌과 같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을 지탱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첫 번째로 놓이는 기초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시키셔서‘새 성전’, 새로운 하나님의‘집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옛 성전’의 구조와 체제와 가치와 목적에 비추어보면 전혀 쓸모없는 재료(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지으시고자 하시는‘새 성전’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머릿돌’이십니다. 이 머릿돌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잇대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새 성전의 일부(일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는 12절에서 이렇게 단언으로 선포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베드로 사도는 이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아니 복음의 증인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증인의 무게


   복음의 증인된 베드로와 요한은 본문 13절 말씀같이 ‘그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들이었습니다. 복음의 증인된 사람들에게‘학문’이 있으면 좋지만, 학문이 없더라도 증인으로서의 사명과 기능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증인은 본문 20절 말씀 같이‘보고 들은 것’을 말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인된 베드로와 요한이‘보고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본문 13절, ‘전에 예수와 함께’ 있을 때에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말했습니다. 자신들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취급했는데,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심으로 하나님의‘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 것을 경험한대로 말했습니다. 

   더더욱 그들과‘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건강하게 된 나면서 걷지 못했던 사람이 함께 있습니다. 분명하게 변화된 증거와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 능력의 표적이 자신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기록된 것같이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쓰인 ‘담대하게’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파레시아’는 사도행전에서 어떤 위험이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성령에 감화된 용기와 확신을 묘사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4:29,31절에서 두 번 더 사용되고 사도행전의 마지막 28:31절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짚고 지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고전15:3~4)을 증언하되,‘게바’(베드로)와‘열두 제자’를 언급한 후“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증인들을 제시 했습니다. 증인으로‘두 세 사람’이면 충분했던 시대(신17:6,마18:20)에‘게바와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거기에‘오백여 형제’라니! 이것은 복음의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얼마나 분명한 사실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증인의 숫자’로 증언의 신빙성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교인숫자’ 많다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믿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증인의 숫자’가 아닌 ‘증인의 무게’를 냉철하게 달아보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증인의 무게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증인의 무게는 오직 한 가지로 결정됩니다. 그것은‘진실성’입니다. 있는 그대로 과장하지 않으며,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조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내 삶속에서 경험한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사람 안에 있고, 그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진실하면’ 넉넉한 복음의 증인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증인은 배운게 없어도 담대 합니다! 보고 들은 것을 말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복음의 증인들 될 수 있기 바랍니다.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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