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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30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것, 예수

  • 성경본문 : 사도행전 3:1~10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9년 6월 30일 2부예부


   우리 교회가 지원해온 선교지에 가면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중에 사지 일부가 불구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소수이겠지만 그들 중에는 어렸을 때에 부모가 일부러 신체를 훼손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측은지심을 유발해 구걸이라도 수월하게 하려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같이 때로 어떤 사람에게, 삶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 해 볼 수 없는, 시작부터 절망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는 이런 저런 상실과 좌절을 어쩔 수 없이 맞으며 삽니다.

   본문에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나이 40에 이르기까지 평생 동안 구걸로 연명해 왔습니다. 이 이야기가 더욱 슬픈 것은 거지가 구걸하는 곳이 ‘미문’,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던 성전의 입구라는 것입니다.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의 집 앞에서 평생 구걸하는 앉은뱅이라니! 

   하지만 놀랍게도 본문은 평생불구로 살아온 거지가 성전으로 들어가며 걷고 뛰고 찬송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누가 그렇게 했을까요? 이 이야기가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성전 앞에 놓인 장애인 거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교의 전례를 따라 ‘제 9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맞추어 성전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10개의 문들 중 ‘미문’(美門)이라고 알려진 동쪽 감람산 쪽으로 난 문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서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걸인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이 미문은 높이가 23m나 되는 이중문으로 고린도 산 황동으로 만들어져 웅장하고 장엄할 뿐 아니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렇듯 아름다운 성전 문 앞에 앉혀진 사람은 이 미문과는 대조적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채 몸을 비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깔판으로 던져진 거적때기나 크게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걸인은 그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여러 사람들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로 인해 손상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간군상’(人間群像)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윗이 시편8:4~5절에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찬송했을 정도로 존귀하고 아름다웠던 사람이 ‘죄와 허물과 행악과 부패’로 인해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사1:5~6) 뿐인 존재로 전락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단지 ‘인간 상태’만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간 체제’의 실상도 보여줍니다. ‘성전’으로 응축된 유대종교, 더 나아가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해 보겠다는 ‘자력구원’의 구호아래 구축해 온 ‘종교, 철학’의 한계와 모순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성전 앞에 방치된 앉은뱅이에게 ‘성전종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성전 문 앞에 앉아있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저녁쯤이면 그를 어김없이 찾아온 것은 허기와 슬픔뿐이었습니다. 단지 육신의 배의 주림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비의 아버지, 위로의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한 번도 들어갈 수 없다는 슬픔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주림과 허기와는 또 다른 차원의 슬픔과 절망이었습니다. 

   이 걸인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막11:17), 하나님 ‘아버지의 집’(요2:16)을 한 번도 들어가 볼 수 없었던 것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적용 때문이었습니다. 레위기21:17~21절에는 아론의 후손 중 제사장들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규례는 성전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제사를 수행해야 할 직무와 관련하여 제사장들에게 요구될만한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율법은 ‘제사장 사회’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걸쳐 장애인은 ‘죽은 개’(삼하9:8) 즉 가치 없고 무능하며 비열한 존재로 인식되는 근거로 변질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걷지 못하는 걸인이 하나님 아버지 집인 성전에 한 번도 들어 갈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는 본문에 등장한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어서, 구걸조차 누군가의 손에 의지했던 사람같이 여러분과 저는 우리 스스로 자신들의 죄의 숙명과 굴레를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적용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는 통로, ‘미문’인 교회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들어올 엄두조차도 못 내게 하는 육중한 ‘거절의 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것, 예수

   구걸인생 40년 동안 걸인이 한 가지 익힌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돈을 가진 사람인지, 누가 자신에게 동전을 던져 줄 사람인지를 알아채는 ‘눈치’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걸인을 주목하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이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걸인의 시선이 이미 베드로와 요한 ‘다음 사람들’에게로 달려갔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행색이 돈 있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의 외침에 걸인은 ‘아! 이번엔 내 예측이 틀렸나?’ 라고 혼자 말을 하며 ‘몇 푼 얻을 수 있겠다’(5절)라는 기대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돌아온 것은 실망만 키운 ‘내게 은과 금은 없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라며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하늘을 가르고 날아온 말씀의 포탄이 걸인의 마음 한 복판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6절,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은과 금’이 없을 때에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자들,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10:5~10)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러 나선 여행을 위해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기’(고후1:9) 위함입니다. 

   이 말씀대로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여행 중에 ‘금과 은’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6절)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할 진리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은과 금’이 없어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줄 수 있습니다. 아니 여러분과 저에게 있는 것이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뿐이어야 우리에게 있는 그것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있는 집 팔고 재산 처분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가난하게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빌립보서3:7~9절 말씀처럼 오직 ‘주 그리스도 예수’만이 내가 소유한 가장 소중한 것이 될 때, 그 분만이 ‘나의 나됨’을 정의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신뢰하게 될 때에 우리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환영하는 아버지 집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선포에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걸인이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고침 받은 걸인은 그 놀람과 기쁨을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서 집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보다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었습니다. 존재의 아버지 하나님의 집, ‘성전’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8절을 읽어봅시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8절에 두 번 나오는 ‘뛰다’(헬로마이)라는 단어는 용례가 흔치 않은 단어입니다. 동일한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 70인 역 중, 이사야35:6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입니다. 이렇게 흔치 않은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을 통해 본문의 사건이 이사야서 35장의 말씀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이 이사야서 35장의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35장은 종말의 구원자, 메시아의 도래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구원의 실상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 35:5~6,10절을 읽어봅시다. 무엇을 말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종말의 구원자로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예외 없이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레위기21장에 대한 왜곡된 적용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집, 성전에 들어 갈 수 없었던 ‘맹인, 못 듣는 사람, 저는 자, 말 못하는 자’가 온전히 회복되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본문의 걸인은 평생처음으로 ‘자비의 하나님 아버지의 집, 성전’에 들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신뢰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다시 걸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중세의 한 교황이 그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화려한 금으로 장식된 성 베드로 성당을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토마스, 이제 우리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말을 못하겠군.” 이 말을 들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과 금은 없다’는 말뿐 아니라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교회는 예수 이름의 권세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가난할 때에는 세상을 살리는 영적 수원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은과 금으로 가득 찰 때에는 영적으로 무기력한 공동체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은과 금’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것’이 되어서 그것으로 세상을 향해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할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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