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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0강도의 소굴이 된 기도의 집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9:45~48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9년 1월 20일 2부예배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규모와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성전의 겉모습은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움켜주어 그저 놀라움을 자아낸다. 화려한 금관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햇빛이 비치는 날에는 불빛처럼 반사되어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성전 뜰을 에워싸고 있는 담 길이는 1,550미터나 되고 담을 따라 지어진 회랑은 정말 일품이다.”

   본문 당시의 성전은 ‘건축광’, 헤롯 왕이 지은 것입니다. 헤롯은 본래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방 에돔 사람으로 벼락출세한 아버지 덕분에 로마 황제의 눈에 들어 주전 37년에 유대 왕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본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 터를 두 배나 넓혀 폭 45미터 높이 9미터 규모로 지붕은 순금으로 덮어 웅장하고 화려하게 성전을 지었습니다. 탈무드에는 “헤롯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건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눅21:5)을 보고 감탄하여 예수님께 말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의 감탄과는 반대로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의 외적인 웅장함과 화려함과는 대조적인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당시 뿐 일까요? 오늘 주님이 이 시대의 교회에 오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는 것(45절)으로 시작됩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성전의 본래의 모습,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사명을 외면한 채 사람들의 야망과 욕심을 채우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래 성전은 에스겔43:5,7절,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는 말씀 같이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드러나야 할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닙니다.‘이방인’이라 할지라도‘여호와께 연합된 사람은 누구나’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본문 46절에 기록된 예수님이 인용하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는 이사야56장 말씀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6:3-7절을 읽어봅시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께‘번제와 희생’을 드려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딸인 유대인 같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분명한 의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서 먼저 거룩하게 구별한 것은 이사야서49:6절,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는 말씀같이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통해서 열방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을‘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삼아‘하나님 구원’을 ‘땅 끝’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거룩한 사명을 외면했습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본문의 유대인들은 ‘만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강도 소굴이 된 성전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을 본문은 간단히 기록하고 있지만 평행이 되는 요한복음2:14-16절에는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짐승들과 용품들은 실은 성전 예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1년에 세 번, 즉 3대 절기,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속죄’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는 반드시 소나 양 같은 대속의 죽음을 위한 짐승이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성전까지 짐승을 끌고 오는 것이 매우 번거로웠다는 것입니다. 먼 길을 끌고 오다보면 마르고 때로는 병들고 다치기도 합니다. 그런 예물을 드리는 것은 레위기22:21절,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라는 말씀에 위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온전한 예물’을 사람들에게는 편리하도록 예루살렘 근처 감란산에 네 군데 시장을 개설하고 희생 제사에 쓸 짐승을 사고팔았습니다. 문제는 더 좋은 목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다 보니 결국은 짐승을 ‘성전 뜰’에서까지 사고 팔 수 있도록 허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특혜’의 배후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눅19:47,20:1)이 있었습니다. 짐승 파는 상인들은 점점 더 시세보다 비싼 값에 짐승을 팔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이를 묵인하고 그 뒷거래로 상당한 부를 축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도 엎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은 ‘성전세’를 환전해 주기 위한 상이었습니다. 성전세에 대한 제정에 관해서는 출애굽기30:12-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성전세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구원)을 환기시켜 주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전세 내는 것은 본문 당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짐승의 매대’를 성전 뜰에 설치하도록 특혜를 주고받은 것처럼,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 ‘반 세겔’을 바꾸어 주는 환전을 위한 상을 ‘성전 뜰’에까지 설치하게 한 것입니다.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은 짐승 파는 사람들과 비슷한 짓을 했습니다. 시세보다 높은 환율을 적용해 돈을 벌었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이를 묵인하고 그 뒷거래로 점점 더 부를 축척해갔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본문 46절 말씀 같이 예수님 보시기에 성전은 ‘장사하는 집’ 정도가 아니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강도들의 아지트가 된 것입니다.

예수의 몸으로 지은 성전

   예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으로 기능할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단단히 결속된 ‘옛 성전’을 해체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새 성전’을 세우시는 분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이 옛 성전에 대한 해체와 새 성전 건립에 대한 일종의 예고편입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평행 본문 요한복음2:19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헐고 일으키시겠다’는 성전은 21절에 기록된 것 같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워질 ‘새 성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옛 성전’의 역할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누가복음23:45-4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고 숨지십니다. 그와 동시에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져 버렸습니다. 옛 성전의 거룩함과 영광은 찟어지고 말았습니다. ‘옛 성전에 드리는 짐승의 피’로서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속죄’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새 성전’ 되신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예수님의 육체”(히10:19-20)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워질 ‘새 성전’의 양상에 대해 이어지는 누가복음20:17절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새 성전의 머릿돌이 되고 그 위에 계속해서 새 성전으로 세워져야 할 부분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 삼아 세워져야 할 새 성전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2:20-22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렇습니다. 새 성전의 머릿돌 되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동체가 ‘새 성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결속되어 진 공동체, 그것이 예루살렘의 ‘옛 성전’을 대체할 하나님의 ‘새 성전’입니다. 새 성전은 베드로전서 1:15-16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같이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 성전은 ‘규모와 화려함’ 때문이 아니고 ‘거룩함’ 때문에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성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선명한 성전, 하나님 영광만이 가득한 성전, 그것이 진정 거룩한 하나님 성전입니다. 


   미국 종교전문 잡지 크리스천 월드에 의하면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습니다. 물론 가장 큰 교회 역시 한국에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한국교회는 규모를 자랑합니다. 2015년 우리나라 종교인구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가 960만 명으로 수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규모와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결코 후한 평가를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기 일 수입니다. 반 기독교적인 저널리즘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조국교회의 실상입니다. 

   주님이 이 시대의 교회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들었던 채찍을 다시 드시지 않으실까요? 십자가를 목전에 두신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하셨던 마지막 기도가 메아리쳐 울립니다.“아버지,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옵소서!”“아버지, 그들로 우리 같이 하나 되게 하옵소서!”(요17:17,11) 우리도 동일하게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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