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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9길 가의 소경, 길 위의 소경들

  • 성경본문 : 누가복음18:35~43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8년 12월 09일 2부예배


   포르투갈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사라마구의 책, ‘눈먼 자들의 도시’가 있습니다. 2008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상영되었습니다. 교통체증 속의 어떤 운전자가 갑자기 빨간 신호등 불빛 앞에서 시력을 잃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태가 심각해져 도시 모든 사람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눈이 멀어갑니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당국은 이 특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 수용합니다. 하지만 머잖아 눈 먼 사람들을 가두던 군인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의 눈이 멉니다. 이후 세상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고 맙니다. 원초적 본능 외의 윤리와 규칙 등, 소중히 여겼던 가치들은 널 부러져 나뒹구는 쓰레기와 오물로 취급됩니다. 

   이야기의 결말 즈음에 홀연히 원인을 알 수 없으나 다시 모두가 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시력을 회복한 후 끔찍했던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주인공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사라구마의 표현대로 인간 중에 ‘눈먼 사람’ 몇몇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눈먼 상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여리고 ‘길가의 소경’을 고쳐 보게 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보지 못해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여리고 ‘길가의 소경’(35절) 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 사람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길을 걷고 있는 ‘무리’(36절) 역시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아니 보지 않는 ‘길 위의 소경’들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길가의 소경’ 뿐 아니라 ‘길 위의 소경’들의 실상과 그들의 눈이 열려서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볼 수 있을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길 가의 소경, 길 위의 소경들


   본문에 기록된 여리고 ‘길가의 소경’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누가9:51-19:45) 막바지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기적들 중 마지막 기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일행이 여리고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구걸하던 ‘길가의 소경’이 무리가 지나감을 알아채고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시력이 망가지면 청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들이 민감해집니다. 본문의 소경 역시 예수님과 따르는 무리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단번에 알아차린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 눈먼 사람은 ‘길 가의 소경’ 한 사람 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눈먼 사람은 ‘길가의 소경’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길을 걷고 있는 ‘무리’ 역시 ‘길 위의 소경들’임을 보여줍니다. ‘길 가의 소경’은 육신의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소경이고, ‘길 위의 소경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길 가의 소경’에 대해서 본문은 35절과 같이 직설적으로 ‘맹인’이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길 위의 소경들’에 대해서는 본문 바로 앞 31-34절과 관련하여 ‘암시’하고 있습니다. 34절 말씀같이 제자들을 비롯해 예수님과 동행 하고 있는 ‘무리’들은 이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34절)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 31-34절에서만 아니고 이미 예수님은 이 여행을 출발하시기 직전인 누가복음9:20-22,31절에서 두 번에 걸쳐 거듭 말씀하셨는데도 ‘길 위의 무리들’은 이 여행의 의도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길 위의 소경들’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무리들이 ‘소경’이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두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갖습니다.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의미를 최후의 만찬과, 만찬 중 말씀을 통해 다시 일러주십니다. 하지만 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눅22:24)에만 골몰하고 다툽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걸어야 할지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길 위의 소경들’ 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길을 걷고 있는 여러분과 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혹 우리 역시 본문의 제자들 같이 ‘길 위의 소경들’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다윗의 자손 예수


   다시 여리고 ‘길가의 소경’을 주목해 봅시다. 구걸하던 길가 소경은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인가?’ 묻습니다. 무리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맹인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절)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무리들은 맹인에게  ‘나사렛 예수’ 라고 알려 주었는데 맹인은 ‘다윗의 아들, 예수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본문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 중 하나였습니다. 흔하고 많은 이름이기에 이름 앞에 ‘나사렛’같은 출신지를 덧붙여 동일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간에 식별을 용이하게 했던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그저 한 ‘자연인’을 부르는 이름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의 아들, 예수’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본문 당시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인자’와 같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자 즉 ‘종말의 구원자, 메시아’를 지칭하는 칭호였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 또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게 될 것에 대해서 구약성경 여러 곳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11:1-2,10절, 예레미야23:5-6절 등입니다.

   구약 말씀만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 마태복음1: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고 시작합니다. 또한 신약성경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22:16절에는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구약성경 모두 하나님의 최종적 구원자, 메시아가 ‘다윗의 아들’,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두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여리고 ‘길가의 소경’은 ‘다윗의 아들, 예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 앞을 지나는 예수님에 대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일관되게 사용되고 있는 메시아로서의 ‘다윗의 아들’로 보고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저 호칭만이 아닙니다. 길 가의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 즉 ‘종말의 구원자’로 보았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41절)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길가의 소경의 통상적 ‘구걸’은 그저 하루 양식, 한 끼 양식을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소경은 예수님께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신 앞을 지나는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 임을 깨닫고, ‘보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나사렛 예수’입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입니까? 예수님이 ‘엘리야, 예레미야, 그들과 견줄만한 훌륭한 선지자 중 하나’(마16:14)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은 여러분과 세상과 역사의 ‘주’(왕)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인정하고 그분을 따라가십니까? 



믿음으로 봄, 봄으로 믿음


   놀랍게도 육신적 두 눈이 성한 채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나사렛 예수’로 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지 못하는 ‘길 위의 소경들’인 것입니다. 반면 육신적 두 눈이 멀어 눈앞의 사물조차 구분할 수 없는 ‘길 가의 소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히 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눈이 떠 있다고 보는 것도 아니며, 눈이 멀었다고 못 보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보지 못할 수 있으며, 여리고 길가의 소경처럼 두 눈이 멀었어도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영역에서 정확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포함해 신앙의 인식은 ‘보아서 믿어지는 것’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보아 알게 되는 것’ 입니다. 이런 인식을 가리켜 한국교회의 큰 스승이셨던 박윤선 목사님은 ‘계시 의존 사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먼저고 이후에 생각하여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도마에게“우리가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요20:25)라고 증언하였습 니다. 의심이 많았던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 이 일이 있은 후 8일 후에 예수님께서 도마와 함께 있던 제자들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는“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말씀하시기를“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27-28절) 

   왜 도마와 본문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교만’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이기적인‘욕심과 욕망’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판단과 목적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보다 더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 나라는 누가복음10:21-22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는 말씀 같이 ‘어린 아이’ 같이 겸손한 사람들,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보입니다. 마태복음5: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말씀과 같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말하듯이 우리 인간의 문제는 몇몇의 ‘눈 먼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이 ‘눈 먼 상태’에 있습니다. 여리고 길가의 소경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눅18:38) 라고 부르짖을 때에 보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나사렛 예수가 다윗의 아들 예수, 즉 하나님이 보내신 최종적 구원자, 메시아임을 인정하고 신뢰할 때에 비로소 눈이 열려 나와 세상을 바로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눈이 열려 자신과 세상을 바로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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