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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9어떻게 변해 가고 있습니까?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1:37~54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8년 4월 29일 2부예배

   모든 것은 변합니다. 존재하는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계속 변합니다. 단지 어떻게 변하느냐? 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성숙으로의 변화인가? 퇴행으로의 변화인가? 이런 변화는 신앙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신앙을 통해 성숙으로의 변화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퇴행적으로 변화되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에는 퇴행으로의 변화의 정점에 이른 두 부류의 종교적인 사람들이 등장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6번이나 “화있을진저!”라며 분노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예수님을 격노하게 만든 겁니까? 이토록 예수님을 격노하게 만든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해 가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속빈 껍데기만 붙든 바리새인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점심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율법(토라)준수를 강화함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정화하려는 것에 목적을 둔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결례에 관한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둘째,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을 사용하거나 취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앞의 두 가지의 결과로 바리새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가까운 교제를 나누는 일을 삼갔습니다. 이와 같은 이들의 구별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근거로 작동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점심식사에 초대된 예수님은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 해 볼 때에 예수님은 ‘일부러’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손을 씻지 않는 자신을 이상히 여기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본문 39절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시는 ‘행동과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식사도구인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는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자신들 안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깨끗이 하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은 실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듯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이렇듯 안팎이 다른 바리새인에 대해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 ‘화있을진저!’라는 말과 함께 바리새인들의 모순적 삶을 폭로하셨습니다. 

  그 첫째는 42절 말씀과 같이 ‘잘못된 십일조의 행태’에 대한 폭로입니다. 십일조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반드시 본문 42절의 표현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공의’의 마음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에 이르기까지 오차 없이 계량화된 십일조를 드렸지만 정작 십일조 안에 꼭 담겨 있어야 할 ‘사랑과 공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43절 말씀과 같이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와 시장에서 사람들에게‘문안 받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이유는 높은 자리 앉기와 인사 받기를 탐하는 것은 마태복음20:25절 말씀과 같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좋아하는 권력행태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와 같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행태를 예수님은 본문 44절의 세 번째 ‘화있을진저’의 말씀으로 결론 지으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마치 ‘평토장한 무덤’과 같다고 하십니다. 평토장한 무덤 위를 밟고 지나는 사람들이 무덤인줄 알지 못하고 다니는 것같이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위장되어 있던 것입니다.

   위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안팎이 다른 모습을 예수님은 누가복음12:1절에서 ‘외식’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외식은 소극적으로는 ‘있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시는 분’(롬8:27)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삼상16:7)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외적으로 흉내 내기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진심을 귀히 여기십니다.




전통에 걸려 넘어진 율법교사

   바리새인들에 대한 이중적 행태에 대해 분노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던 한 율법교사가 이의를 제기합니다. 율법학자가 이의를 제기하고 항변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바리새인과 종교적으로 쌍둥이 형제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학자가 바리새인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바리새인은 율법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항변하는 율법학자에 대해 예수님은 역시 ‘세 번’에 걸쳐 ‘화있을진저’라고 분노하며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46절 말씀과 같이 율법 교사들이 ‘사람들에게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들은 한 손가락도 이 짐을 더는 일에 힘쓰지 않는 행태’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율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 자체는 본래 시편19:7~8절 말씀과 같이 완전하여 영혼을 살아나게 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진리’입니다. 문제는 율법이 율법 교사들에 의해 왜곡되고 오용되는 것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라’라 불리는 율법서인 모세오경(창세기~신명기까지) 외에 이를 주석한 ‘미쉬나’가 있었고, 이 미쉬나를 주석한 ‘탈무드’가 있었습니다. 토라를 해설하고 그에 따르는 세부적인 규칙들을 만들다 보니 분량이 많아지고 토라의 본래의 의도와는 거리 먼 과도한 세칙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결국 율법자체를 훼손하게 된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본문 46절에서 예수님이 ‘지기 어려운 짐’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과도한 세부규칙들을 말합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규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본래 모세 오경, 토라에는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례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7:3절에 ‘장로들의 전통(유전)’이라고 표현한 미쉬나나 토라에 있는 규정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는 율법자체가 아닌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 ‘손 씻는 규례’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다보니 결국은 이 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인 ‘자비와 긍휼’을 외면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마가복음7:7,9절 말씀과 같이 사람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 율법을 저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47-51절 말씀과 같이 율법 교사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해 온 것처럼 ‘선지자들을 죽이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는 행태’에 대해 분노하십니다. 자신들의 전통으로 진리를 왜곡하고, 참된 진리를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은 예레미야7:25~26절 말씀과 같이 구약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당시의 율법 교사들이 이 끔찍한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율법 교사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째’, ‘화있을진저!’의 분노의 말씀(52절)이 율법 교사들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과도 같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독점하여 왜곡하고 오용함으로 자신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고, 또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다른 사람도 막아서는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듯 잘못된 전통과 관습은 진리를 왜곡하고 결국은 진리로부터 극히 멀어지게 합니다. 
 



전인이 통합된 성숙한 사람 

   본문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를 통해 살펴 본 것과 같이 종교의 이름으로도 사람은 퇴행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종교의 가면을 쓴 외식은 그 어떤 퇴행보다도 더 추하고 끔찍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거듭 분노를 발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랭컨 길키가 쓴 ‘산둥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1943년부터 45년 사이에 중국의 산둥의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길키는 수용소 내의 다양한 인종 종교 계층의 사람들의 생활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천주교 신부들과 개신교 목회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이기심과 탐욕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길키는 이기심과 탐욕은 종교적인 사람들 안에도 작동될 수 있다고 기록하는 대목에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eibuhr)의 말을 인용합니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라는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의 교만과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 싸움에서 인간의 교만이 이기면 종교는 죄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반면 거기서 자아가 하나님을 만나 개인의 이익 너머 무엇에 굴복하면, 인간 보편의 이기심으로부터 아주 요긴하고 진귀하게 해방될 유일한 가능성이 종교에서 열릴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아울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거기에 공적으로 종교적 직분을 부여 받은 저와 같은 사람들이 특별히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면 ‘퇴행’이 아닌 ‘성숙으로의 변화’, ‘믿음의 진보’(빌1:25)를 이루어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그의 은혜만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오직 다시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빌3:8~9)하여야 합니다. ‘다함없는 하나님 사랑’이라는 Y좌표와 ‘무조건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X 좌표 속에서만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이 씨름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에 관한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3:10~14절, 에베소서4:13~15절, 딤전4:12~16절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성숙한 변화, 믿음의 진보에 이를 수 있는지 지혜를 얻어야하겠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은 예외 없이 변합니다. 단지 어떻게 변하느냐? 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퇴행적 변화로 인해 ‘돌’같이 굳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의 싹을 틔우고 열매 맺게 할 ‘옥토’로 변할 것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경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싹 띄우고 열매 맺어야 합니다. 날로 새로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가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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