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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8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0:38~42
  • 설교자 : 홍순설 목사
  • 예배일자 : 2018년 3월 4일 2부예배

   부끄러운 일이지만 ‘미투’(me too!) 선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조직 안에서 여성에 대해 상사들의 지위를 이용한 성추행과 성폭력에 대한 고발의 선언입니다. 법조계에서 시작된 미투 선언은 문화계, 연예계,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으로 퍼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저급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실상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는 상반된 여성에 대한 인식과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남자와 여자의 창조 의도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여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따르고 있는 여러분과 제가 따라야 할 여성과 관련된 제자도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한 마르다

   누가복음에서 본문의 위치는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전반부에 놓여 있습니다. 기록자 누가는 그저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해 간 것이 아니고 ‘제자도’라는 주제 하에 본문 사건을 재배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르다와 같이 분주한 것 보다는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라는 것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앞선 중요한 가르침이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 제자도에 있어서 또 하나의 경계, 담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도 남자와 동일하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도 남자와 동일하게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가고,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당시 여자들의 신분과 위상이라는 것은 형편없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당시 유대인들이 여자들을 아이들과 함께 숫자에 치지 않았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유대인 성인 10명이 되지 않으면 회당으로서의 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개방과 자유, 다양성의 첨단을 걷는 나라 미국 유대인 사회에서 최초의 여성 랍비가 일전에 추천도서로 읽었던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의 저자 라오미 레비였습니다. 그녀는 1900년대 후반부에 최초의 여성 랍비가 되었습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높은 경계와 담, 차별을 두어 온 것입니다. 

   이런 선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들여다봅시다. 유대인 집에 손님이 올 때에 손님을 영접하는 것은 남자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38절에 보면 놀랍게도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라고 기록해도 될 것인데 굳이 본문은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 라고 기록함으로 영접한 사람이 ‘여자’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가 알려 주듯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는 나사로라는 오라버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마르다라는 ‘한 여자’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영접하였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인 마르다도 남자와 동일하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2:18절,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 할 것이요”라는 말씀과 같이 여자가 남자와 동일하게 성령 받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마르다라는 ‘한 여인’ 이었다는 것이 놀라운데 이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사실을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39절과 같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라고 다시 한 번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당시의 유대인 생활상을 좀 더 들여다보면 ‘마리아의 행동과 그것을 용인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파격적인가?’ 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가옥 구조 하에서 거실은 남자들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부엌입니다. 특별히 본문과 같이 예수님과 그 분의 제자들인 남자들이 집에 오셨을 경우는 더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거실에 있습니다. 그것도 손님 중의 주빈인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를 못 마땅하게 보았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42절,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다’ 는 표현과 같이 긍정하신 정도가 아니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남자들의 자리, 거실에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 하시거나 이상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어느 문화와 관습에 예속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와 관습을  뛰어 넘어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마리아를 보고 행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았다’라는 것에 대한 보다 본질적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누군가의 ‘발치에 앉는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사도행전2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라고 자신을 변증합니다. 여기에서의 ‘문하’라는 말은 영어 킹 제임스 역의 표현, ‘at the feet of Gamaliel’과 같이 ‘가말리엘의 발치에 앉아서’라는 말입니다. 즉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꺼이 그 분의 삶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마리아를 용인하심으로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신의 제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니고  본문 42절과 같이 그 사실을 기뻐하셨습니다. 당시의 문화와 시각에서 볼 때에 놀라운 일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 등 세상의 모든 경계와 담을 넘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는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할 제자도의 첫 걸음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먼저 우리 각자가 이런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변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랫동안 굳어져 온 가치와 관습은 쉽게 변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변화하려 할 때에 감수해야 할 불편함과 치러야 할 대가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꺼이 감당해야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본문의 진리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그것이 관습이라는 이유로 묵인되고 있지는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본문의 진리에 이를 수 없어도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에 온전히 이르고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손발이 귀보다 먼저 앞서 행할 때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로 인정된 두 여자, 마르다와 마리아의 행동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 40-42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한 후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40절 상반절)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께 나아가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니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절 하반절) 라고 합니다. 마르다의 말에는 판단과 불평과 원망이 들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41-42절,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봉사와 섬김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앞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차선을 이탈한 차가 속도를 낼수록 더 큰 사고를 낼 수 있는 것처럼 목표와 방향을 잃은 분주함과 열심은 오히려 더 많은 불평과 원망을 빚어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섬김의 분주함과 열심보다 앞서야 할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섬김은 그 다음입니다. 귀가 할 일을 손발이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란, 주님의 발치에 앉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께 시선을 맞추고,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기뻐하는 것보다 앞설 것은 없습니다. 

 ‘로렌스 형제’로 알려진 수도사 이야기가 책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먹을 빵을 굽고 주방 일을 맡은 수도사였습니다. 로렌스는 빵을 굽고 부엌일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의 시선은 늘 주님께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방문자들은 그의 모습 속에서 천상의 미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방문자들은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수도자들이 아닌 주방에서 빵을 굽는 로렌스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로렌스는 수도원의 그 누구보다도 바쁘고 분주한 자리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의 마음은 주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지 바쁜 삶은 우상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것에서 자기 존재 의미와 자긍심을 두게 된다 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무엇인가 성과를 내고, 그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에 사로잡힌다면, 대단하다는, 잘했다는,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분주하고 바빠 주님의 발치에 앉을 시간이 없다면 그것은 분명 주님을 바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쁨과 분주함의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꿈꾸는 것을 함께 꿈꾸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그려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상전과 종, 빈부와 귀천 등, 세상이 만들어 놓은 모든 사회적 경계와 담을 단숨에 넘으십니다.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단히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들은 자기의 의도와 목적과 열심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귀 담아 듣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먼저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을 따라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살펴 본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는 온전한 제자입니까?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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